가문유래기원
기원

  우리 영천이씨는 고려초평장사 고울군 휘 문한공을 시조로 삼아 칠세에 사파로 갈라지니 차파 광록대부 상장군 봉익양군 휘 극인이요 공의 후손에 영양군 울산군 양파로 분파되니 영양군 시 문정공 휘 대명의 육세손에 분위육파하여 열조들의 높고 낮은 벼슬이 대대로 이어지고 문학이 상승하였으며 충효가 상전하였다.


 육파중에 제오위이신 파조 감사공의 휘는 은이요 호는 송헌으로 고려충목왕사년(일삼사팔) 무자에 탄생하시어 호정하륜선생의 문인으로 문과에 등제하셨다.


 조선 태조오년(일삼구육) 병자에 울산군사를 제수하신 그해 십월에 왜구가 침입하여 부군을 납치 대마도로 연행되어 체류중에 유명한 시한 수를 남기시고 불굴절 환국하시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시고 탁배 수원공주 계림부윤하시고 특제 경기 경상도 도관찰출척사 사헌부대사헌하시다.


 부군이 재직시 식량증산대책의 일환으로 수리시설을 증개축관리하여 가뭄과 홍수를 극복해서 풍년을 이룩하는 부국강병지책을 두차례나 상소하시니 임금께서 따르시고 부군을 경상 전라 도안무사로 임명하심에 지방을 순찰하시며 저수지위치선정과 철저한 공사관리 및 농잠업을 장려하시고 지방관사들의 목민실태를 파악하여 상벌교화하였으니 부군께서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는 데 초월한 대책이라 하겠다.


 태종십칠년 (일사일칠) 정유사월십칠일 향년칠십세로 서거하시니 진충사군하시고 역지휼민하였음이 국조실사 왕조실록 열조통기등에 자세히 기술되어있어 우리 이씨가에 명조가 되시었다.


 슬프다 세조정축(일사오칠)에 충장공 대전선생의 단종복위순흥사변으로 멸문의 화를 입고 거듭되는 병화로 전문이 성을 잃고 전국방방곡곡으로 흐터저 숨어 살었기로 크게 쇠잔하여 졌으나 그 후 차츰 신원된 후로 다시 번성하여 달관문인이 많았으며 근세에 와서도 각부서의 요직에 근속하는 후손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으니 조선의 고결하신 음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보첩은 영조십칠년(일칠사일) 신유관향초보로부터 영조이십이년(일칠사육)에 병인보하고 정조이십이년(일칠구팔)무오보와 헌종십일년(일팔사오)을사보와 일구이사년갑자보까지는 대동보로 편찬하였고 일구사팔년무자보와 일구칠이년임자보는 파보로 수보하였는바 그후 근어삼십년이 되어 인간일세기 도래함에 그간 생졸 혼인 과관등 변동사항이 많으리라 사료되어 종의로서 일구구구년 십일월 일일 사무실을 개설하고 수단을 하던 중 영양군 후손제파에서 갑자대동보후로 자손이 너무 심성하고 상거가 낙낙하여 각파파보를 몇차례 수보하니 상위된 사항이 혹 발생하므로 앞으로 가 염려되어 각파가 모의하여 영양군파세보를 편찬키로하고 이년여에 걸쳐 협의를 하였으나 상반된 의안을 좁히지 못하고 끝내 무산되고 말았으며 파선조묘소에 정화사업과 재실보수등으로 파보가 다소 늦어진 감이 있다.


 장기간내내 편집을 맡아 노심초사하신 분은 족숙 윤환 명석 성환씨이며 각파수단과 수보소에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적극협력하여 주신 분은 효종 학우 우영씨등 족종장노이시라 상하이권으로 편집을 마침에 종회에서나 규진에게 서를 지으라 명하거늘 놀래어 배움이 적은 저가 어찌 서를 감당하리요 하고 굳이 사양하니 문중장로분들께서 오파주인으로 마땅히 할만하다하며 거듭 재촉하거늘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또한 나의 일이라 사양하는 것만이 도리가 아니므로 일어나 세수하고 옷깃을 바로 한후 풍부한 자료를 참고하여 이르노니 족이란 가까이는 일가의 친이요 멀리로는 백대지친이 되니 그 초는 한 할아버지에서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져서 각기문호를 이루어 의관이 상전함에 가끔 대보와 파보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간 사회의 정치경제적변혁으로 핵가족시대를 맞이하여 족친간의 분리산거는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사회현실이므로 자연친소원근하여 조상의 유덕과 근본을 잊어버리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종족들이 수없이 많을진데 아주 미개한 씨족들까지도 뿌리를 찾고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조선의 위업과 역사를 가르치고 잊지 않도록 경계함은그 방법만이 다를뿐 동서간의 전인류가 그 뜻은 다를바 없을 것이다. 오파문중 장로분들께서도 이를 염려하여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파선조묘소에 정화사업과 석물을 갖추고 산하재실을 중수해서 경내에 송헌정사를 이룩하여 석채례를 올리고 가을에는 묘정에 올라가 추향을 받드는 것은 지극한 흠모의 정으로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요 자손들이 재실에 모여 화수지의를 강론하고 족보를 중간함은 종친 상호간의 소목을 밝혀 계체지의를 알아서 우리 감사공파인은 가장 가까운 혈족임을 자부하고 조상의 뜻을 받들어 생각하며 표제지심이 저절로 우러나 선과 의를 알아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충신하게되면 세인들이 과연 영천이씨 감사공파라 할 것이다.


 끝으로 지중지엄한 수보를 명확하고 알아보기 쉽게 번역하고 무단됨이 없도록 미력을 다한 흔적이 보이나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누보자가 간혹 있음은 심히 유감스러우나 세부득의 소치인줄 알며 내용면에서 오류도 혹 있으리라 생각되는바 파중의 기대에 못미칠까 염려되며 금번에 녀와 배에 명휘를 등재하고 세수에 서기와 간지를 병행하여 보를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고안한 것은 특기할만 하다고 사료된다.


 이세여에 걸쳐 편집을 맡아 노고하여주신 족숙 세분과 삼파각대표 위원 및 각파 수단유사제위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그간 지나온 경위를 삼가졸문으로 대략 기술하여 영천이씨감사공파 임오파보서로 삼고저 한다.